한국역사여행/고려

고려시대 개요

PassionAgain 2014. 6. 13. 11:54

고려는 왕건이 세운 나라입니다.

왕건은 지방호족들을 잘 융합하여 세력을 얻어 고려라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고, 신라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복속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여 명실상부한 통일국가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또한, 발해 유민들도 대거 수용을 했지요.

고려라는 국호에서 보이듯이 고려는 옛 고구려를 부흥한다는 의미가 큽니다.

후삼국의 통일이야기는 아주 재미있죠.

발해가 아직 위에 있었으니 후사국이라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네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높아짐에 따라 금성(경주)의 기운은 날로 쇠약해졌어요. 신라 귀족들은 사치하고 부패에 빠지게 되었죠.

그래서 신라 말기에 힘든 삶을 참지 못한 농민들에 의해 봉기가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벌주(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봉기가 일어나고 붉은 바지 농민군도 일어나서 수도인 금성을 쳐들어 가기도 했죠.

신라 지배층은 멀리 있는 지방까지는 어찌 해볼 수도 없고 금성만 그럭저럭 지켜나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호족은 지방의 유력한 세력으로 세금도 직접 거두고 군대까지 둘 정도로 힘이 커지게 되었죠.

견훤은 신라의 장군이었는데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여 신라로부터 독립을 하고 8년뒤 완산주(전주)를 수도로 후백제를 세우게 되죠. 견훤은 백제사람은 아니었지만 충청도, 전라도 지역의 사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백제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게 되죠. (후백제는 훗날 사람들이 붙이 이름이죠)

궁예는 신라의 왕자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세달사라는 절에서 승려가 되었고 옛 고구려 땅인 철원을 기반으로 후고구려를 세웠죠.

초반에는 견훤의 후백제가 강성했습니다. 남송이나 왜와도 교역을 하였고 원래 땅이 비옥하여 농사도 잘 되었기 때문이지요. 

송악(개성)의 호족인 왕륭은 궁예가 송악으로 오는 것을 알고 싸우기 보다는 항복을 선택하죠. 대신 아들(왕건)을 송악 성주로 삼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왕건은 궁예를 신임을 얻는 장군이 되었고, 바다를 통해 후백제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궁예가 "관심법"을 통해 부인과 아들을 죽인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정말 사실인지는 모를 일이지요.

나중에 고려가 후삼국통일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궁예를 "나쁜 인물"로 묘사했을 수도 있습니다.

궁예는 강력한 왕권을 위해 호족들을 누르고 중앙 집권을 하려 했고, 왕건은 그러한 호족들을 잘 이해하고 감싸주었죠. 그래서, 호족들은 왕건을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신숭겸, 복지겸등이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궁예는 어딘가 떠돌다가 맞아 죽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후백제는 고려와 싸워서 매번 이겼지만, 고창(안동)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이후에 국운이 기울게 됩니다.

그리고 견훤의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들이 파가 나뉘어 싸우게 된 것도 큰 원인 중 하나죠.

신검과 금강이 있었는데 견훤이 금강을 더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신검의 무리들이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김제에 있음)에 가둬 버리죠. 견훤은 금산사를 몰래 빠져나가 고려의 지배에 놓인 나주땅으로 도망칩니다.

견훤의 도망을 알게된 왕건은 나주로 와서 견훤에게 어른 대접을 하고, 후백제 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게 됩니다.

견훤이 실제로 그 전투에 참여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여하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칼을 겨누게 되는 안타까운 순간이죠.

신라는 너무 쇠약해져 있어서 마지막 왕인 경순왕때 고려에 합병되고 말았어요.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 태자"는 사라져가는 신라를 그리워 하며 삼베옷을 입고 산에서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자, 고려의 왕건은 이제 새로운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데 원래 새로운 왕조의 첫째 왕은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를 같이 세운 무리들의 힘이 너무 강하고 그들을 모른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왕건은 지방 호족의 세력에 힘입어 왕이 되었으므로 호족들을 잘 융합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여러 호족과 결혼 관계를 맺는 결혼 정책을 씁니다.

왕건에게는 29명의 부인이 있었고 자녀는 34명이나 되었답니다. 그리고, 결혼하게 되면 "왕"씨를 하사하게 되어서, 여기저기 왕씨가 넘쳐나게 되었죠.

이 세력들이 훗날 왕건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급부상 하게 됩니다.

왕건은 백성들의 삶도 많이 생각해서 지방 호족들이 터무니 없이 걷어갔던 세금을 1/10로 정확하게 정의를 했습니다.

호족들은 중앙의 높은 관직을 차지 하면서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 했죠.

이러한 호족들을 강력히 견제한 왕이 바로 광종 입니다.

광종은 처음에 호족들의 의견을 조용히 다 들어주는 것 처럼 해서 호족들을 안심시켰죠.

그런 후에 "노비 안검법"을 시행해서 호족들의 노비들을 양인으로 되돌리게 됩니다. 호족들은 내키지 않았지만 양인의 수가 너무 적어서 세금이 걷히지 않아 나라 곳간이 비어가고 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죠.

이 노비는 언제든지 호족들의 군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호족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는 필수로 없애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 광종은 "과거제"를 시행하게 됩니다.

과거라는 시험을 통해 똑똑한 인재를 등용해서 나라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죠.

호족들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광종은 그런 호족들을 가만 놔둘리가 없죠.

과거제를 통해 새로운 인물도 등용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은 힘들었어요.

시험 보기 전에 "가장"이라는 것을 제출했는데 거기에는 4대째 어떤 관직을 했는지 적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높은 관직에 있었던 집안 사람을 계속 높은 관직에 등용하는 안좋은 모습을 보이게 되었죠.

이 사람들은 과거도 필요 없이 "음서"라는것을 통해 관직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호족 이후에 등장한 이런 세력을 "문벌 귀족"이라고 부릅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도 유명한 문벌 귀족중 한명이죠.

이 시기에 거란이 침략하게 됩니다. 거란의 소손녕은 송나라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를 들며 고려를 공격하려 했는데 서희와의 담판을 통해 오히려 서희는 "강동 6주"를 차지 하게 됩니다.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겠다고 하면서 거란의 군대를 달래서 보냈지만 고려는 다시 송나라와 교역을 하게 됩니다. 이후에 2차 침입이 있었는데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도망을 가야 했지요. 가서 다시 인사를 드리겠다고 달래서 보냈는데 인사 하러 가지는 않았죠.

그래서 3차 침입이 벌어지는 데 흥화진에서 쇠가죽으로 물을 막아 놓은 다음 물로 공격을 해서 승리를 합니다. 그러나, 소배압의 군대는 계속 침략을 하게 되고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이 이를 막아내는데 이 전쟁을 "귀주대첩"이라 부릅니다.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 100년이 지나 여진족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윤관이 함경도 일대에 "동북 9성"을 쌓아서 고려 땅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는 여진족이 너무 많아서 고려의 세력으로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여진족인 고려를 잘 섬길테니 그 땅을 달라고 해서 실제로 고려 땅으로 만드는 것은 실패하죠.

이후에 홀대 받던 무신들을 중심으로 정변이 일어나 권력을 찬탈하게 되는데 이를 "무신 정변"이라 합니다.

무신들의 입맛대로 허수아비같은 왕을 세우고 실제 모든 권력은 무신들에게 있었죠.

문신과 무신에 대한 처우도 불만이 있었고, 문신들이 무신들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대한 것이 큰 원인이었죠.

실제로 고려시대 과거시험에는 "무신"을 뽑는 시험도 없었답니다.

무신들이 정치나 잘했으면 모를텐데 그들도 권력을 잡고나니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라는 점점 쇠약해지고 있는데, 무시무시한 몽골 군대가 쳐들어 오게 됩니다.

깜짝 놀란 무신들은 강화도로 도망가게 됩니다. 백성들에겐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지도 않고 자기들만 강화도로 도망간거죠. 강화도는 섬이기 때문에 내륙에서만 전쟁을 잘하는 몽골 군대를 피하기 좋은 장소였죠.

잘 알고 있는 "삼별초"도 나라를 구하기 위한 단체가 아니라 무신들을 호위하기 위한 특별 군대에 지나지 않았어요.

용인 처인성 전투에서 승려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면서 승리하기도 하지만, 몽골 군대는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았어요. 고려땅은 원나라가 지배하게 되었죠.

무신 집권층은 다시 개경으로 불려 나오지만 삼별초는 강화도에 남아 항쟁을 하게 되죠.

몽골에 대해 항쟁했다기 보다는 그곳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려고 했죠. 삼별초의 배중손은 진도로 옮겨 그 곳에 성을 쌓아 나라를 세우려 했고, 몽골군이 내려오니 다시 탐라(제주)로 내려가서 성을 쌓고 항쟁을 했죠.

결국 여몽 연합군에 의해 삼별초의 항쟁은 끝이 납니다.

원나라는 고려를 매우 힘들게 만든 나라입니다.

고려는 원나라의 사위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즉, 고려의 왕자는 어렸을 때 원나라에 가서 그들의 풍습과 말을 배우고 원나라 여자와 결혼하게 됩니다. 왕이름도 충렬왕, 충숙왕등 "충"자가 들어가는데, 원나라에 대해 충성을 다하라는 의미이죠. 또한, "공녀"라 해서 수십만명의 고려 여인들을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원나라에 보내지 않기 위해 조혼이라고 해서 딸을 일찍 결혼시키는 풍습이 생겨나기도 했죠. 


고려시대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까지 약 500년 동안이나 존재했던 강성했던 국가 였습니다.

조선왕조 실록 못지 않은 고려왕조 실록도 존재했으나 거란과 몽골(원나라)의 침입때 모두 불타 없어졌죠. 많이 아쉽습니다.


고려시대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위 표를 보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신정변을 기준으로 전,후기로 나뉘고

전기는 거란의 침입을 기준으로 초기, 중기로 나눕니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이 집권하는 무신집권기가 약 100년동안 이루어지고, 그 때 원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어

조선은 원간섭기에 들어갑니다.

원나라가 약해지고 명나라가 세력을 키울 무렵 공민왕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벗어나려는 개혁이 시작됩니다.

그 개혁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지만 공민왕은 자주적인 왕으로 기억됩니다.

공민왕 이후에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간의 힘겨루기가 시작되고, 최영 이성계등 신흥 무인세력과 함께 신진사대부가

조선을 개국하는 세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