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여행/조선

[조선 왕 열전] 태조 이성계, 조선을 세우다

PassionAgain 2014. 5. 27. 14:52

얼마전 KBS에서 "정도전"이라는 사극 드라마를 했었죠. 50회 동안 정말 재밌게 봤는데, 이제 볼 사극이 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그 드라마를 통해 정도전이란 인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조선 건국의 의미와 과정에 대해 보다 더 자세하고 재미있게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은 태조 이성계 어진이에요.

지금 전주 경기전에 있죠. 전주는 제 고향이기도 해요 ^^  전주에 들르시면 경기전은 꼭 보시기 바랍니다.

태조 이성계 (1335 ~ 1408) <-- 생몰년도가 아닌 재위년도

자, 이성계에 대해서는 아래 몇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을거에요.

- 조선 건국

- 고려말 신흥 무장, 전쟁의 달인

- 경복궁 건립

- 한양 천도

- 아들과의 갈등

- 말년에는 함흥에서 쓸쓸하게 보냄


그리고, 이성계와 관련된 주요한 사건들에 대한 연표에요.

1380 : 황산대첩

1388 : 위화도 회군

1392 : 태조 즉위

1394 : 한양천도

1395 : 경복궁 건립

1400 : 1,2차 왕자의 난으로 태상왕이 되어 함흥으로 옮김

1402 : 한양 복귀, 볼교 심취

1408 : 창덕궁에서 승하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의 사람. 함경도 최북방 함흥 사람이죠.

고려말의 국제정세는 원나라가 기울어가고 신흥 강국 명나라의 등장하던 때 였어요.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할 때 화주지방(지금의 함경도 영흥)을 통치하기 위해 "쌍성총관부"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함흥 지역은 원나라 세력이 강하게 미치는 곳이었고,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 - 목조)는 원나라 관리(다루가치)로 원나라를 위해 일하던 사람이었어요.

그쪽 지방이 원나라가 완전히 다스리는 나라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원나라 관리로 일했을거에요.

원나라에서 고려인의 차별이 점점 심해졌어요.


공민왕은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적인 고려를 만들고자 했고, 쌍성 총관부를 공격해서 탈환했죠. 그 일을 도운 사람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 입니다.

그래서, 이자춘은 공민왕의 신뢰를 얻었고, 이성계는 아버지를 이어 공민왕때 함경도 지역 동북면 병마사 역할을 수행했어요.

이성계는 뛰어난 무인의 자질이 있었고, 특히 활쏘기 실력이 대단했다 해요.

까마귀 다섯마리 머리를 다 맞추다. 담비 20마리를 명중시키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어요. 뭐, 왕이 한 일이니까 조금 뻥을 쳤을 수도 있겠지만 전쟁에서 전승을 거두는 경력으로 봤을때 믿을만한 것 같기도 해요.

실록에는 멧돼지 호랑이까지 사냥했다는 기록도 있죠.


고려말에는 북쪽의 홍건적, 여진족 남쪽의 왜구가 극성을 부렸어요.

우리나라에 불패신화를 가진 장군이 두 명 계시죠.

바로, 이순신과 이성계지요.

이순신에 대해서는 많이 아실거고 또 나중에 이야기가 나올거에요.

이성계는 공민왕때 원나라 몰아내던 때와 위화도 회군 까지 30년동안 전쟁에서 무패의 기록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리고, 유명한 1380년 황산대첩에서 일본 소년장수 아지발투와의 접전하여 대승을 거둠으로써

이성계는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할 인물이라고 여겨지게 되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게 되죠.

그래서 당대 최고의 장군이었던 최영장군과 더불어 이름을 날리는 장군이 되었어요.


최영장군과 이성계와의 갈등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알아볼 수가 있어요.

출신지 : 개성(수도) vs 함흥(시골)

정책 : 친원 vs 반원(친명)

출신성분 : 권문세족 vs 신흥사대부 (정도전)

위와 같은 부분에서 서로 같은 길을 가지만 다른 생각을 갖던 두 인물이죠.


자, 정도전 이야기가 나왔으니 정도전 사진 하나 올려야지요?



1384년 함주막사에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와 조선건국의 시발점이 됩니다.

정도전은 목은 이색의 제자였고 성리학을 공부하는 학자였지만, 고려 말의 낡은 정치와 원나라에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꿈을 갖게 되었어요.

그것은 바로 "재상 정치"

즉, 임금이 아닌 신하들로 이루어지는 정치입니다.

이것이 훗날 이방원에게는 좋지 않게 보여 죽임을 당하는 빌미가 되는데요. 정도전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은 세습을 하면서 이어가며 좋은 임금, 나쁜 임금이 나오지만, 

신하는 지속적으로 과거시험등을 통해 유능한 사람을 뽑아 놓으면 이 나라에는 항상 유능한 재상이 다스릴 수 있다 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민본 정치"의 뜻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꿈이 채 이루어지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을거에요.


[위화도 회군]

아주 유명한 사건이죠?

1388년 원나라는 명나라를 치겠다면서 고려에 파병을 요청합니다.

고려와 원나라는 부마국 관계 입니다.

부마란 사위란 뜻인데요. 원나라는 주위에 지배했던 나라들에게 결혼을 통해 관계를 맺어 왕을 사위삼고

원나라에 어렸을때부터 데려와 교육을 시키는 정책을 시행했어요.

사위나라니까 무조건 말을 들어라 이거죠.

당시에 군사적 실권자는 최영 장군.

원나라를 도와주고 요동지역에 공백이 생겼으니 그 지역을 차지 하자고 주장합니다.

최영이 총사령관으로 개경에서 지휘하고 파병군의 사령관으로 이성계와 조민수를 임명합니다.

이 때, 왕은 공민왕의 아들 우왕이었죠.


이성계는 이 전쟁은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전쟁에서 이겨봤자 최영 장군에게 모든 공이 돌아갈 것이고 지게 되면 자기 탓이 되는 아주 애매한 상황이었던 거죠.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워 요동정벌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칠 수 없다.

 - 여름철은 농번기라서 군사를 일으키기 힘들다.

 - 전쟁하는 틈에 왜구가 공격할 것이다.

 - 여름철에 장마에 전염병에 걸리고 활의 아교가 녹아서 쓸 수 없다.

작은 나라라고 스스로 표현한 건 좀 기분 안좋지만 대부분 말이 되는 것들이었어요.

하지만, 최영 장군과 우왕은 요동정벌을 끝까지 몰아부칩니다.

몰아부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명나라가 고려에 대한 영토를 차지하려는 야욕때문이죠.

최영은 명나라 주원장이 군사를 일으킬 힘이 별로 없다는 것도 간파하고 이 기회에 아예 요동지방을 

차지해버리려고 했어요.

실패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최영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지 못한 것도 커요.

아버지 공민왕이 암살당한 것을 두려워해서 최영장군을 곁에 두려고 했던 우왕의 실책이었죠.

하지만, 실제로 장맛비가 오래 내려서 진군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성계는 조민수와 합의를 보고위화도 회군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군사를 돌려 바로 개경을 쳐서 왕이 된 것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하면 정권 교체의 명분(당연한 이유)이 없기 때문이죠.

개경에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장군을 체포하고 유배를 보내 처형하게 됩니다.

무리한 전쟁을 일으켜 나라를 도탄에 빠트리려고 했다는 이유였죠.

최영장군은 자기가 잘못이 있고 나라에 불충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실제로 아주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해요.

이렇게 이성계는 고려의 No.1 이 됩니다.


[조선 건국]

이성계는 바로 왕이 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우왕을 강제로 폐위하고 왕이 되면 반대세력에 부딪히게 되겠죠,.

일단 군사적 실권만 장악하고 정치적 비전과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을 홍보합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과전법"

1391년 과전법 (토지개혁) : 권문세족에게 독점된 토지를 신흥관리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줌.

여기서 "이팝"이라는 말이 생기는데요. 쌀밥이 이씨가 내린 밥이라 하는 뜻이죠.

고려의 마지막 왕은 공양왕인데, 창왕을 폐위하고 이성계 말을 잘 들을 이씨 왕족을 하나 천거한거죠.

마지막 때가 되었을때 공양왕의 양보(선양)를 받아 왕으로 추대됩니다.

이말은 즉슨 공양왕 스스로 능력이 없음을 실토하고 능력있는 이성계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교서를 발표하는 거죠. (태조 즉위 교서)

내가 3번이나 사양했지만, 공양왕이 거듭 요청하여서 내가 그 뜻을 받아 들인다 라고 합니다.


즉위식은 개성의 수창궁에서 올립니다. (1392. 7)

단군 조선을 계승 했다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천도하죠.

당시 개경에는 고려의 귀족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제대로 간섭없이 운영하려면 적당한 새 도읍지가 필요했던 것이죠.

그래서,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 프로젝트를 수행합니다.


처음 후보지는 계룡산 일대였으나, 너무 남쪽에 있다는 이유와 풍수지리 적으로 좋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하여

한양을 그 다음 후보지로 검토합니다.

그리고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건의를 받아 한양으로 결정합니다.


*수선전도



한양은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으로  둘러 쌓여서 방어에 좋습니다.

게다가 한강은 바다로도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조운 (조세를 걷음)에 이롭습니다.

쌀이나 특산물을 싣고 궁궐로 들여와야 하는데 한강 만큼 좋은 곳이 ㅇ벗겠죠.


왕조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궁궐도 필요했어요.

정도전은 경복궁이 북악산 아래 남면(남쪽을 바라봄)하여 세워졌으므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자고 합니다.

반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자고 건의합니다.

그러나, 유교의 원칙에 따라 군자는 남면을 해야 한다는 이론을 받들어 정도전의 의견대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궁궐은 아래쪽을 바라보는 구조로 설계가 되죠.


[이름의 유래]

경복궁 : 이성계가 경복궁이 지어진 뒤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서 정도전에게 이름을 지으라고 하니, 정도전은

군자가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만년에 경복흔 복을 누리리라는 시경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으로 왕의 집무실은 근정전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종묘 :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 (궁궐 왼쪽)

사직 :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 (궁궐 오른쪽)


[이방원과의 갈등]

일단 왕자의 난은 이성계의 세자 책봉에 미흡한 점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조선의 건국에 앞장선 다섯째 이방원을 눈앞에서 배제해버리면 분명 그 성격상 가만히 있을 이방원이 아닐텐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친 아들인 방석(의안군)이 세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정도전의 지원을 받아 세자책봉을 성공하게 되죠.

이방원과 그 형제들은 이 부분에 대해 대단히 분노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도전과 갈등의 골이 심해져 마침대 정도전 마저 죽이게 되고,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두 아들 - 세자 포함-을 무참히 살해합니다.

이 일로 인해 아들들과 정도전을 잃고 화가난 이성계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감.

"이방원이 나중에 왕이 된 이후에 부모에게 효를 다하지 못하는 면목이 없어 아버지를 한양으로 돌아오시도록 사신(차사)을 보내지만 그때마다 사신을 죽입니다. 이를 가리켜 함흥차사라 부르게 되었죠.

어느날, 박순이란 사람이 어미말과 새끼말을 데리고 가서 어미말이 떠나고 나니 새끼말이 우는 모습을 보여주어 이성계의 마음을 돌려서 한양으로 돌아옵니다. 이 이야기는 연려실기술, 택리지에 실려 있습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한 이방원은 하륜등을 통해 세자가 되려 하지만 세자를 죽이고 임금이 되려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될까봐 둘째 형인 방과가 제2대 왕이 됩니다. 바로 "정종"이죠.

정종은 아들이 없어서 다시 한번 세자 책봉 문제가 불거지게 되고, 다시 세자에 물망에 오른 넷째 방간과 다섯째 방원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돌다가 박포라는 사람이 방간을 부추겨서 무력으로 세자가 되려 하자 이를 미리 알고 이방원의 세력이 방간을 죽이게 되니 이를 제 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제 2대 왕이 된 정종은 2년 정도 왕위에 있다가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식으로 왕위에서 내려옵니다.

그래서 제 3대 왕은 이방원(태종)이 되죠.

이방원은 즉위 하자마자 사병을 혁파하고 호패법을 실시하고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합니다.

또한, 6조 직계제라는 것을 통해 의정부를 무력화 시켜서 왕권을 강화 시킵니다.


자, 태종 이방원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 글을 마무리 해야겠죠?

건원릉(태조 이성계)에 얽힌 사연이 있습니다.

구리시 근처에 있는 건원릉에는 이성계가 왕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조 무덤 하나만 있습니다.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 조선 건국 이전에 돌아가셔서 개경에 묻혀있고요.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이성계보다 먼저 돌아가자 현재 덕수궁 정동 일대에 무덤을 마련합니다.

둘째 부인을 지극히도 사랑했던 이성계는 경복궁에서 문을 열고 보면 계비의 무덤이 보이도록 가까운곳에 무덤을 마련했죠. 무덤을 수호한 흥천사의 종소리가 끝날때가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연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방원이 왕이 되어 보니 자신을 왕이 되지 못하게 했던 계모의 무덤을 보는게 싫었겠죠.

그래서, 정릉으로 무덤을 옮겨 버립니다.

계비의 무덤이 있던 곳은 정동 으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정동극장 자리가 아마 그 근처 일듯 합니다)


이성계는 정종때 상왕이 되고, 태종때 태상왕이 되어 장수하여 태종때 돌아가십니다.

이방원은 계비 무덤근처에  무덤을 쓰기가 싫어서 좋은 묘자리를 찾게 되죠.

이성계는 함흥지역에서 보고 자랐던 억새풀을 봉분에 심어달라고 유언을 했고, 그 유언을 받들어 억새풀을 많이 심습니다. 아직도, 건원릉에는 억새풀이 많다죠.

이성계의 일생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나이가 많아서 세자 책봉하는데 실수도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권문세족들이 판치는 고려를 버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크게 남을 만한 사건입니다.

무력 쿠데타를 하지 않고, 백성들의 민심을 살펴가면서 민본정치의 뜻을 펼친 것도 높이 살 부분입니다.

또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도전"이라는 위대한 개혁가, 사상가, 정치가가 그 많은 것을 같이 이루었다는 것이죠.

정도전을 죽이면서까지 왕위를 가져가야 했던 이방원에게는 "정도전"이란 인물은 "재상정치"를 꿈꾸며 왕은 허수아비로 삼고 자신이 직접 왕노릇을 하려 한다는 말을 퍼뜨려야 자신이 왕이 된 명분이 바로 서겠죠?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정도전"이란 이름은 거론될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고종때가 되서야 "정도전"을 공신으로 다시 세웁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좋은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무슨 이유인지 생각해보고 깨어 지혜롭게 행동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사는 미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