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여행/권선생 역사교실

[2014.9.14] 역사교실 열네번째 시간

PassionAgain 2014. 9. 18. 12:26

너무 오랜만에 수업을 했어요.

채현이네가 일본여행을 가기도 했고, 제가 아프기도 했지요.

오랜만에 하니 그전에 배운거 많이 까먹은거 같았어요^^

저도 좀 정신이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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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을 시작하기전에 광해군의 업적과 인조반정등에 대해서 다시 복습을 했어요.

숙종은 장희빈으로 유명하죠?

인현왕후를 질투한 질투의 화신이기도 하죠.

결국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게 되는데, 이 사약도 곱게 받지 않고 깨뜨려버리죠.

그런데, 장희빈이 꼭 인현왕후를 미워한 것으로만 죽음의 이유가 되진 않겠죠.

그 당시에는 서인세력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장희빈은 남인들의 천거에 의해 후궁이 된 사람입니다.

서인들이 하도 득세를 하니 숙종이 좀 짜증이 나있던 상태여서 남인들의 말을 듣게 된거죠.

장희빈으로부터 아들(경종)이 태어나니 서인들은 긴장합니다.

남인의 나라가 될 것 같아 불안했던 것이죠.

숙종은 서인을 버리고 인현왕후도 내쫓았지만 이후에 무수리 출신 최씨가 아들을 낳아 숙빈이 되면서

다시 남인을 배격하고 서인세력을 들이게 됩니다.

인현왕후는 중전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오래 살지 못했죠.

세자가 왕이되면 다시 또 정치혼란이 올것이라 생각하고 여러가지 증거(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들을 찾아내어 사약을 내립니다.

장희빈이 죽을때 아들 경종의 고환을 움켜쥐어 2세를 생산을 못하게 했다는 것은 야사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경종도 몸이 약하고 2세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죠.

인현왕후가 죽게 되어 새로 중전으로 맞은 사람이 바로 정순왕후 입니다.

숙빈최씨를 통해 낳은 아들이 바로 영조입니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유명하죠. 당쟁으로 하도 싸워댔으니 정치가 잘 되었을리가 없습니다.

영조는 장수하면서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올랐던 왕으로도 유명합니다.

또하나.... 영조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사건은 바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사건이죠.

41살에 낳은 사도세자가 어렸을때부터 총명해서 많은 기대를 걸었으나, 갈수록 세자 품격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인해

아버지 영조가 많이 실망하게 되었다 하죠.

사도세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명분을 만들려 한 이야기 일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죠.

정조의 어머니는 숙빈 최씨로 처음으로 무수리 출신으로 왕의 간택을 받아 후궁이 된 사람입니다.

서인세력들은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를 했습니다. 왜냐면 아버지를 죽인 것에 동참한 세력들을 가만 놔둘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정조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영조는 정비가 죽자 나이 어린 계비를 중전으로 들였는데 그녀가 바로 "정순왕후"입니다.

단종의 비도 정순왕후인데요. 정순왕후 송씨입니다.

영조의 계비는 정순왕후 김씨이죠. 

정조가 즉위할때 어머니인 정순왕후는 정조보다 나이가 더 어려서 정치에 크게 관여는 하지 못했지만

정조가 죽은뒤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하면서 천주교를 탄압한 인물이 됩니다.

또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60년의 어두운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죠.

정조는 새로운 수원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기리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수원화성으로 행차하는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수원화성은 처음으로 중국식 벽돌을 쌓아 만든 성이고, 수도를 옮기기 위해 완벽하게 설계했던 신도시 였습니다.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를 하면서 바른 개혁을 꿈꿨지만,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개혁은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조는 정확히 19세기의 시작인 1800년에 승하하십니다.

다음 시간은 대망의 조선의 마지막 입니다.